건축가 승효상의 [묵언] 침묵으로 읽는 수도원 건축과 영성

 



침묵의 건축가, 승효상이 말하는 공간의 본질

『묵언』은 건축가 승효상이 유럽의 수도원을 직접 답사하며 기록한 건축 에세이입니다. 이 책은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라, 건축과 영성, 그리고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은 사유의 기록입니다. 저자는 화려한 도시 건축이 아니라, 침묵과 절제가 깃든 수도원의 공간에서 건축의 본질을 찾습니다.
승효상은 오래전부터 ‘빈자의 미학’을 건축 철학으로 제시해온 인물입니다. 『묵언』에서도 그 철학은 그대로 이어집니다. 수도원의 공간은 장식이나 과시가 아닌, 절제와 비움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는 건축이 인간의 삶을 어떻게 품어야 하는지에 대한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그에게 수도원 건축은 단순한 종교 건축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를 성찰하도록 돕는 ‘침묵의 구조물’입니다.
유럽 수도원 순례기: 공간이 신앙을 말하다
이 책에서 소개되는 수도원들은 특정 종교를 넘어서 인간의 내면을 향한 공간으로 읽힙니다. 저자는 유럽 각지의 수도원을 방문하며, 그 공간이 지닌 빛, 재료, 동선, 침묵의 밀도를 섬세하게 관찰합니다.
수도원 건축의 특징은 단순함과 반복성, 그리고 자연과의 조화입니다. 화려한 장식 대신 빛이 공간을 채우고, 높은 첨탑 대신 낮은 벽이 사람을 감

싸 안습니다. 이러한 건축적 태도는 수도자의 삶과 맞닿아 있습니다. 말 대신 기도, 소유 대신 절제, 과시 대신 침묵을 선택하는 삶의 방식이 그대로 공간으로 구현된 것입니다.
책 속의 사진들은 이러한 건축의 정신을 더욱 또렷하게 드러냅니다. 인공 조명보다 자연광을 중시하는 수도원의 공간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른 표정을 보입니다. 아침의 희미한 빛, 낮의 단단한 그림자, 저녁의 고요한 어둠이 건축을 살아 있는 존재처럼 변화시킵니다.
이러한 사진들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공간의 영성을 시각적으로 번역한 이미지라 할 수 있습니다.

‘묵언’이라는 태도: 건축과 삶의 윤리

『묵언』에서 가장 인상적인 개념은 바로 ‘말하지 않음’입니다. 이는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존재를 깊이 이해하기 위한 태도입니다. 승효상은 건축 역시 말을 많이 하는 대신, 조용히 존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과도한 장식과 상징이 넘쳐나는 현대 도시 건축 속에서, 수도원 건축은 오히려 가장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아무것도 과시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공간의 본질이 또렷해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건축뿐 아니라 삶의 방식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적게 소유하고, 천천히 바라보고, 깊이 머무르는 삶. 『묵언』은 그러한 삶의 미학을 건축이라는 언어로 풀어낸 책입니다.

유럽 수도원 순례 노선 개요: 침묵의 길을 따라



『묵언』 속 여정은 단순한 여행 동선이 아니라, 건축과 영성을 함께 사유하는 순례의 흐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저자의 순례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시작해 이탈리아로 이어지며, 수도원 건축의 역사적 층위와 영적 전통을 단계적으로 따라가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베즐레와 롱샹, 르 토로네 수도원 등 중세 수도원 건축의 절제된 미학을 보여주는 장소들이 등장합니다. 이어 샤르트뢰즈 지역과 그르노블 인근의 수도원들은 고요함과 고립의 건축이 어떤 영적 깊이를 형성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러한 공간들은 자연 속에 깊이 자리하며, 인간의 내면을 향한 침묵의 환경을 만들어 냅니다.

남부 프랑스를 지나며 아비뇽과 생 레미 드 프로방스 등지의 수도원 건축은 지역적 풍토와 결합된 단순한 형태의 건축을 드러냅니다. 빛과 돌, 그리고 자연 풍경이 결합된 이 공간들은 수도원 건축이 주변 환경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이후 여정은 이탈리아로 이어집니다. 제노바를 지나 루카와 피렌체, 산 지미냐노, 시에나로 이어지는 길은 중세 기독교 문화의 중심지들을 관통하는 순례의 축을 형성합니다. 특히 아시시와 수비아코, 로마로 이어지는 동선은 수도원 건축이 신앙의 역사와 어떻게 맞물려 발전해 왔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순례 노선은 단순한 지리적 이동이 아니라, 침묵과 절제의 건축을 통해 인간 존재를 성찰하도록 이끄는 사유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각각의 수도원은 서로 다른 시대와 양식을 지니고 있지만, 공통적으로 ‘말하지 않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하나의 영적 흐름을 이루고 있습니다.


사진가의 시선에서 읽는 『묵언』

이 책은 건축서이면서 동시에 매우 뛰어난 사진 에세이입니다. 수도원의 빛과 벽, 복도와 창, 그리고 비어 있는 공간들은 사진가에게 중요한 사유의 대상이 됩니다.

특히 비어 있는 공간이 주는 긴장감과 고요함은 인물 사진이나 종교 사진을 작업하는 이들에게도 큰 영감을 줍니다. 말이 사라진 자리에서 이미지가 말하기 시작하고, 공간의 침묵은 오히려 깊은 감정을 드러냅니다. 이러한 점에서 『묵언』은 단순한 건축 기행문을 넘어, 시각 예술가에게도 의미 있는 참고서라 할 수 있습니다.

『묵언』이 오늘의 독자에게 주는 의미

현대 사회는 끊임없이 말하고 보여주기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묵언』은 그 반대의 방향을 제시합니다. 덜 말하고, 더 깊이 바라보며, 공간과 삶을 절제 속에서 이해하는 태도입니다.

유럽 수도원의 건축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독자는 자신의 내면과 마주하게 됩니다. 이 책이 안내하는 여정은 외부 공간의 탐방이면서 동시에 내면을 향한 순례입니다. 건축을 통해 인간의 존재와 신앙, 그리고 삶의 방식까지 사유하게 만드는 점에서 『묵언』은 단순한 건축 에세이를 넘어선 깊이를 지닌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무리

『묵언』은 화려함 대신 절제, 소음 대신 침묵, 과시 대신 존재를 선택한 건축의 기록입니다. 건축가 승효상은 유럽 수도원의 공간을 통해 건축이 인간을 어떻게 품어야 하는지 조용히 묻습니다.

공간을 바라보는 시선, 사진을 읽는 태도, 그리고 삶을 성찰하는 깊이를 동시에 얻고 싶은 독자에게 이 책은 매우 섬세하고 울림 있는 안내서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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